아무도 없는 거리 - 2009/10/30 10:45:54
오늘따라 다들 출근이 늦다. 회의때 협의하기로한 일정표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일정표의 항목채우기가 끝나갈 때 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 10:30 한국문화사
금요일 오전 수업이 있다는 건 종강까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오늘도 알람을 듣지 못했으면 그대로 회의를 진행했겠지. 책상위에 사장님 연락이 있을 경우의 대응법을 짧게 메모한 후 사무실 밖으로 뛰어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편의점에 가서 김밥이라도 사먹을까 하다가 핸드폰을 꺼내보고 생각을 접었다.
- 10:31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수업이 더 중요했다. 전력질주를 하기엔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수는 없었다.
공기가 이상하다. 이 부근 공기가 안좋은 것은 늘상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틀리다. 악취같은 것이 아니다. 묘하게 무겁달까 흐름이 느리달까...... 공기의 위화감이 느껴지자 다른 것들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
그렇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사무실을 나와 강의실로 달려가는 현재까지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아까 편의점 입구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도 이것이었다. 점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수업시간이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이상하다.
눈앞에 건물로 들어가기 위한 계단이 나타났고 쉼없이 뛰어올라갔다. 여기도 사람이 없다. 2층 홀에는 보통 공부하는 학생들이 한두명은 있어야 할 터이다. 일단 정해진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에난 조그만 창으로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청각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강의실 안은 어두웠다.
나는 내심 안도감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냥 신경과민 이었나. 우연이었을 뿐인건가?'
- 찰칵, 끼이이이...
조용히 문을 열으려고 했지만 녹슬은 문의 경첩은 어쩔 수가 없다. 최대한 죄송한 표정으로 교수님께 목례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없다.
무겁고 정체된 공기. 지독한 고요함. 섬득함이 날 덮쳤다. 좀 전에 내가 보았던 건 환상인가, 나의 바램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지금 사라진건가. 확실한 것은 다른 강의실에 가 보는 것이다.
......그 뒤로 3개의 수업중인 강의실을 찾았지만, 모두 마찬가지 였다. 창문으로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무도 없다. 게다가 마지막 강의실에서 깨달았다. 문을 닫으면 다시 모두가 보인다. 정지해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마치 시간 속에 같혀 버린 것 같다. 밖을 나와 걷고있지만 바람 한 점 불지않고 게임이 정지된 것 같은 거리의 풍경이 나를 미칠것 같이 만들었다. 이상한 것은 공기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식하기 시작하자 숨쉬는 것 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졸려......'
내려앉는 눈꺼플을 강제로 들어올리며 힙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다시 돌아온 나는 잠금장치의 커버를 열고 힘겹게 비밀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 삑...
- 삑...
- 삑...
- 삑...
- 삑...
- 삑...
지금 이 순간만큼 잠금장치가 쓸모 없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아니, 없었나? 졸음을 참기 힘들다.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왜 여기 서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영문도 모른채 장금 장치의 손잡이를 돌렸다.
- 딸랑 -
자리에 가서 누워야...
- 찰랑 -
자고 싶...
- 딸랑 -
졸...
- 찰랑 -
시끄ㄹ-
- 푸욱 -
등 뒤로 부터 기묘한 감각이 느껴지면서 졸음이 싹 사라졌다. 눈 앞이 선명해졌다. 눈이 아플정도로 지나치게 선명한 색이 내 눈을 찔렀다. 손잡이를 앞으로 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배 부근에서 뭔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소리가 들려왔다.
'우아아악!'
'꺄아아악!'
소리와 함께 흐릿한 형체들이 점점 선명해진다. 공포에 질린 익숙한 얼굴들 뒤로 내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시들어가는 꽃 한송이가 올려진 빈 책상이 있을 뿐. 아, 그랬구나. 난 몇번이나 이걸 반복해 온걸까. 손잡이를 놓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둔탁하게 생긴 막대기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서야 배를 내려다 보았다. 휑하게 뚫려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채 날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손잡이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얽매일 필요 없잖아."
- 딸랑 -
왼손에는 방울 몇개가 달려있는 나무 채.
- 찰랑 -
오른손에는 금속 찌와 형형색색의 천이 달린 나무 막대기.
- 딸랑 -
변함없이 심드렁한 무표정.
- 찰랑 -
어디로 돌아가라는 걸까.
- 챙 -
"이 세상으로."
소녀가 두손을 모아 채와 막대기에서 울리는 소리를 멈추게 하자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나 이 건물 5층에서 뛰어내렸구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버렸구나. 땅에 부딪히는 순간 머리가 깨지고 척추가 밀려 살같을 뚫고 나온 내 몸뚱아리를 보고 있었다. 그 후에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 기이이이아아아아아아아악!!! -
나는 죽지 않았다. 죽임 당한거야! 당했다구! 돌려줘야해! 그냥 죽기 위해서는 돌려줘-
- 딸랑 -
......
- 찰랑 -
......
- 챙 -
"다음을 기약해. 이제 돌아가."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의 진리가 밀려들어오는 느낌. 지극히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진 세상의 규칙이 머리속에서 끄집어내지는 기분. 이토록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아니 필시 세상 사람의 대다수가 잊고 있던 것은...
사라진다.
돌아간다.
하지만 끝이 아니야.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는 것이 끝.
세상과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돌아가는 것.
-Fin-